해당 글은 오래전에 작성한 글이라서, 더 이상 제 생각이나 관점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넷플릭스에는 퇴사하는 구성원이 남아있는 구성원을 위해 또는 회사의 개선을 위해 왜 본인이 퇴사하는지 내용을 정리해서 메일로 작성해서 보낸다고 한다. 이런 메일을 “부검 메일" 이라고 부르며, 퇴사하는 구성원은 한 명도 빠짐없이 “부검 메일”을 작성해야 한다고 한다. (현재에도 부검 메일 문화가 유지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부검 메일” 형식을 차용해서 내 퇴사를 위한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첫 회사에 입사와 퇴사는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퇴사 당시에는 처음이라 어떤 내용을 기록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은 이런저런 조직을 경험해 보았고 개인적으로 당시에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지금 글로 기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왜 떠나는지.
처음 입사했을 당시에 디자인 팀은 운영 디자이너를 포함해서 6명의 디자이너가 있었다. 몇 차례의 퇴사가 이어지면서 나와 팀장님을 포함 두 명으로 줄었고 꽤 오랜 시간 둘이서 기획, UI, 배너, 프로모션 운영 업무를 진행했다. 패션 커머스 특성상 매 시즌별 많은 이슈들을 대응해야 했고, 데일리 한 배너 운영 업무들도 꽤 크게 업무 비중을 차지했다.
운영 업무를 마무리하면 하루의 업무시간 거의 대부분 사용했고, UIUX 업무는 야근으로 진행하게 되었는데 이런 패턴이 계속되면서 UI 디자인과 UX 플로우 설계 퀄리티를 높이는 게 점점 체력적으로 힘들어졌다.
콘텐츠 촬영을 담당하던 콘텐츠 팀에 운영 업무가 이관되게 되면서 업무 패턴 부담은 줄었지만, 레거시 시스템이 많아서 수동으로 진행해야 하는 업무들 때문에 오히려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늘어났다. 결론적으로는 업무 패턴이 이런 식으로 오래 반복되면서 본연의 업무를 챙기기가 힘들었다.
팀 전체 인원이 2명인 상태로 일하게 되면서 내가 작업한 안들이 실제로 릴리즈되는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었지만, 매우 촉박한 일정 때문에 중요한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기능들을 다양한 시안이나 방향성을 탐색해 볼 시간은 부족했다. 디자인적으로 조금 더 챙길 수 있는 부분들이 나중에 시간을 내서 챙기자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되면서 점점 더 아쉬운 상황이 많아졌다.
팀의 인원을 늘려서 디자인 퀄리티를 챙기기 위한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쉽사리 팀 인원이 늘어나지는 않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연차가 쌓이기 전에 디자인 퀄리티를 챙길 수 있는 조직을 경험해 보고, 많은 디자이너들이 있는 곳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당시 회사의 규모는 폭발적으로 커지는 시점은 아니었으나, 조직 규모(구성원 수)를 키우기 위한 몇 번의 시도는 계속되었다. 새로운 C 레벨(명칭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과 팀장급 인원들이 입사하였고, 잦은 조직 개편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실제 실무진의 숫자는 이전과 동일했지만 새로운 팀장급, 본부장급 인원들이 들어왔으므로 본부 기준으로 하위에 새로운 팀들이 생기고 조정되는 방향으로 조직개편이 되었다.
우리는 꽤 큰 기술 부채를 갖고 있는 상황이었고, 개발팀과 디자인팀 내부에서는 현 상태 유지는 가능하지만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경영진과 각 팀 팀장들에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서비스 리뉴얼이 필요하다는 이슈를 지속적으로 재기했다.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리뉴얼을 진행해야 한다는 건 공감을 받지 못했고, 당장 론칭해야 할 이슈에 밀려서 리뉴얼 계획은 계속 미뤄지는 의사결정이 반복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당시 새로운 팀장급, 본부장급 인원들은 웹, 앱 개발과 디자인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했다. (UI 디자인을 “아트”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Dev 환경과 Prod 환경을 이해 못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웹과 앱 제품을 만드는 조직에 계속해서 엇나간 요구사항을 탑다운 형태로 내리꽂는 상황이 매일 발생했고 본부와 본부, 팀과 팀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 한 번의 조직 개편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촬영과 운영 디자인을 진행하는 콘텐츠 팀에 UXUI 디자인을 담당하던 나를 이동시키겠다는 통보가 왔고, 면담에서 내가 다시 운영 디자인도 담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나왔다. 내가 그런 인사 이동에 거부를 표시하자, 당시 본부장은 조직 이동 또는 퇴사를 나에게 제시했고, 팀장님의 설득으로 다행히 인사이동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이 일을 기점으로 조직에 대해서 강한 불신을 갖게 되었고 퇴사하기 직전까지 신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회사에서 배운 것.
신입이었던 시기부터 정말 운이 좋게도 작업했던 많은 안들이 대부분 릴리즈되는 것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서비스를 어떻게 기획해야 할지, 각 부서의 어떤 요구사항을 수집하고 반영해야 할지, 어떻게 디자인에 기능을 표현할 수 있을지 어깨너머로 또는 직접 체험해 보면서 배워볼 수 있었다.
막연하게 그냥 만들어진다고만 생각했던 서비스를 직접 만드는 과정에 꽤 많은 부분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은 책임감을 갖고 업무에 임하는 자세로 만들어주었고 작지만, 순간순간 결정에 조금 더 세심하게 고민하는 습관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실제로 서비스를 릴리즈하기 위해서는 디자인만 제일 우선시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점도 배웠다. 이건 기획부터 참여하면서 배운 점인데 과거에는 “디자인이 좋다면 어떻게든 될 거다”라고 생각했다면, 기획 단계에서 개발자들이 다양한 개발 스펙을 고려하고 정의하는 작업을 보면서 제일 앞에 있는 디자인된 화면을 구현하고 사용자들에게 경험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수많은 고민이 들어간다는 점을 배웠다.
여러 가지 기술 부채를 갖고서 서비스를 만드는 일을 정말 쉽지 않다. 조금 더 좋은 경험과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서 구성원 모두가 노력을 하더라도 현재 상황상 불가능한 기능이나 디자인이라면 사용자들에게 전달되기 어렵다. 구성원 개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리적인 시간과 인력이 필요하고 이런 문제의 해결은 난이도가 매우 높거나, 매우 오래 걸린다.
이런 상황이 되면 우리에게는 항상 몇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선택지는 대부분 똑같고 우리의 선택도 대부분 똑같다.
우리는 대부분은 2번 또는 3번을 선택했다. 앞서 말했듯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대한 공감을 얻어내지 못한 탓도 있지만, 쉽고 빠르게 만드는 방법이 2번과 3번인 것도 무시 못 할 이유라고 생각한다.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을 경험해 보니 외부에서 바라볼 때는 이해되지 않는 결정이, 나조차도 문제를 직면하니 2번과 3번부터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내부에서는 이런 의사결정 과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를 배웠다.
회사에서 아쉬운 것.
이 문항은 “회사가 이랬다면 떠나지 않았을 것”을 전제로 한다. “왜 떠나는가”의 내용과 곂칠 수 있어서 굳이 작성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좋든 싫든 진솔하게 글을 작성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남겨보려고 한다. “사람에 대한 투자”가 조금 더 제대로 되었다면 아마 고민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당시에는 직군에 대한 이해가 없는 조직개편이 자주 있었고, 책임감을 갖고 일했던 구성원들에 대해서도 연봉 동결을 결정했던 상황이라 이런저런 전제라도 내 결정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인 기록을 위해서 남기는 글이라서 굳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마무리가 아쉬웠지만, 첫 회사로 서울스토어는 꽤 인상 깊은 지점이 많았고 지금까지도 내가 만들고 있는 서비스를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하는데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곳이라서 꼭 한번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