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돌아보기

#Retrospect #Life · 2023. 12. 31

2023년은 왜인지 입에 붙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끝나버렸다. 이번에는 잊어버리지 말고 꼭 연말이나 연초에 쓰자고 다짐해서, 적절한 시점에 기억을 더 잊어버리기 전에 작성하는 것 같다. 늘 그렇지만 최대한 솔직하게 작성해 보려고 한다.

올해부터는 '생활'에 대한 것도 하나 추가했다. 내 업에 대한 것만 다루는 게 좋을지.. 특별히 그런 것 없이 그냥 아무거나 다뤄볼지 생각했는데 블로그도 새로 만든 김에 기록을 위해서 아무거나(?) 다뤄보기로 했다. (생활에 대해서 작성하려니 살짝 어색하기도 함)

4월에 결혼을 했다. 22년 7월부터 집을 구하고 함께 지내기 시작해서 23년 4월에 결혼식을 하고, 9월에 파리로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정확히는 결혼식을 올린 건 아니다, 가족들도 우리도 작게 진행을 하고 싶어서 PKM이라는 예쁘고 작은 식당을 대관하고 그곳에서 우리 가족, 처가 식구들만 모여서 식사를 했다.

결혼 후에는 일과 작업 중심 생활 패턴에서 아내와 대화, 타티와 윌로 챙기기, 집안일의 비중이 늘어났다는 것을 빼면 엄청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결혼하기 전에는 인생에서 즐거운 일 1순위가 언제나 작업과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내와 함께 카페를 다니고, 산책하고, 쓸모없는 농담 따먹기하는게 이렇게 즐겁게 될지 몰랐다.

함께 살게 되고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 생겼다!'' 는 것을 실감한 아주 작은 몇몇 순간들이 있는데, 그중 첫 번째는 아내와 함께 병원을 방문할 때 듣는 '보호자' 소리다. 이게 뭐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가 싶은데, 맨 처음 들었을 때는 '내가 아내의 보호자라니..' 하면서 정말 혼자 싱숭생숭했다.

두 번째는 타티(1번 고양이)가 의료 사고를 당해서 정말 위험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아내의 첫 반려동물이기도 했고 우리 둘 다 타티를 특별하게 생각해서 매우 힘들었다. 종교도 없는 내가 살면서 제발 아무 일도 없게 해달라고 그렇게 절실하게 빌었던 적은 정말 처음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완쾌도 하고 옆에서 자고 있는데 가끔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책임져야할 가족이자 함께 하는 반려들이 생겼다는 기분을 느낀다.

소속이 있지만 소속이 없는 것처럼 많은 조직을 돌아다녔고, 작업도 많이 하기는 했지만 말도 아주 많이 했던 한 해였던 것 같다. 함께 즐겁게 일했던, 많은 자극을 받았던 동료들을 떠나보내서 아쉬운 기억도 많이 남는다.

개인적인 성향으로는 한 번에 하나의 것에만 집중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 번에 두 개 이상을 저글링 하면서 잘 해본 일이 적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 성향과는 다르게 23년은 시니어 디자이너(디자인 챕터에 리드들이 생겼지만) 역할을 계속 수행했고, 디자인 시스템 관련 업무와 스쿼드 업무, 챕터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 내가 해내야 하는 일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보낸 것 같다.

제품 디자이너, 플랫폼 디자이너라는 업을 생각해 보면 가장 근본적인 역할은 '사용자가 겪는 문제를 해결한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사용자의 문제가 아니라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처리해야 할 문제들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류의 문제들은 보통 함께 일하는 사람 사이의 문제, 조직 전반의 프로세스 또는 방향성 문제 등인데, '문제가 있다'라고 감지하기에는 훨씬 쉽지만 아직까지 내가 주체적으로 해결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아주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솔직하게는 어떤 회사든 이런 문제는 늘 있는데 '내가 굳이 해결해야 할까?'' 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문제를 묻어두면 편한 것도 아니다. 결국 제품, 기능을 만든 다는 것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고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문제*를 제기하고 서로 해결책을 제시하고 합의를 해야 한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결국 일을 진행하고 제품, 기능이 만들어지고 사용자에게 전달된다.

* 사용자의 문제, 조직의 문제, 동료의 문제.. 등 무엇이든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해결하기 위한 모든 문제

이 과정을 경험하면서 올해 내가 스스로 가장 불편하게 느끼고, 해내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이런 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잘 만들어내고 싶은 욕심이 없었나 스스로 반문해 봐도 잘 만들어내고 싶은 욕심이 큰 것은 확실하다. 이런저런 일들을 해보면서 고민을 깊게 해본 결과 '내가 굳이 해결해야할까?'의 마음이 크게 작용하고 '내가 의지하는 몇 몇 사람들이 해결하겠지'라고 내심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사용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이야기하지만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일 잘 만들고 싶어 하는, 욕심 있는 사람만 이야기한다.

사용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이야기하지만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일 잘 만들고 싶어 하는, 욕심 있는 사람만 이야기한다.

올해 불편하게 느꼈던 것이 위에 내용이라면 의외로 어떤 일들이나 함께 하는 동료들이 나도 그들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그들도 나에게 의지한다는 것을 느꼈다. 동료들이 욕심이 작다, 크다의 논지가 아니라 나를 향한 동료들의 신뢰, 조직의 기대 역할 등 많은 요소로 인해 내가 해결해야 하는 결정적인 문제와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Craft를 잘 하고, 제품을 잘 만든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잘 만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해결해야 하는 문제고 2024년에는 조금 더 적극적인 자세를 갖기 위해서 노력하려고 한다.

어쩌다 보니 올해는 디자이너로서 혼자 여러 스쿼드를 돌아다니고, 겸직도 하고 모바일 디자인 시스템도 새롭게 설계하고 벌려 놓은 일들도 걸쳐있는 일들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많이 만들게 되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주제와 비슷하면서도 결이 다른 주제인데 다양한 종류의 도메인, 일을 하다 보면 무한정 리소스를 사용하면서 진행할 수 없다. 일을 끝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전 회사와 팀에서는 내 선임자, 리드가 나서서 리소스를 조율해 주고 진행되어야 할 내용을 확인했는데, 23년은 거의 항상 혼자 돌아다니면서 PM, 엔지니어들, 다른 디자이너들과 업무를 진행해야 해서 매우 애매한 상황들이 많이 벌어졌다.

보통은 스쿼드, 팀 외부 인원을 전제로 시니어 디자이너로서 실제 업무를 진행하는 디자이너에게 조언을 하거나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결정해야 하는 마일스톤이나 디자인 이슈, 구현 이슈들이 수없이 많았다. 이런 일들은 어찌 되었든 내가 결정을 내릴 수 있지만 제일 모호하고, 확신이 없는 것들은 언제 일을 마무리하는가이다.

여기서 일의 마무리란 제품, 기능을 릴리즈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어디까지 구현, 디자인, 논의를 한다면 이게 끝나는가 같은 결정이다. 작게 생각한다면 스프린트를 끝내면 마무리가 되는 게 아닌가라고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넓게 생각하면 다를 수 있다. 스프린트는 궁극적인 수준과 지향점으로 도달하기 위한 작은 단위다. 제품은 스프린트마다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스프린트 단위마다 개선되거나 나빠질 수 있다.

따라서 스쿼드와 팀에서 일을 마무리한다는 것은 8번째 스프린트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리소스를 써서 스프린트를 돌던, 마일스톤에 도달한다면 안정적인 제품 또는 기능이 될 수 있는가 인 것 같다. 큰 조직이라면 하나의 기능에 수많은 리소스를 사용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조직이라면 하나의 제품 안에 수많은 기능을 제한된 리소스로 만들기 때문에 일을 마무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결정은 매우 중요하게 동작하는 것 같다.

* 결국 이게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나중에 부채로 작용할 수 있어서

이 지점에서 내가 잘한 결정도 있겠지만, 확신이 없이 내린 결정*도 수 없이 많았다. 작년 회고에서도 좋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했는데, 작년과는 결이 살짝 다르지만 아직도 이런 류의 것에는 확신을 갖기 어려운 것 같다.

* 일을 마무리하는 것은 장기적인 결정이기 때문에 당장 잘했는지 알 수 없다.

23년에는 팀에 합류한 이후 계속해서 웹에 집중하다가 막바지에는 모바일에 집중했다. 오랜만에 다뤄보는 모바일 디자인이라서 그런지 적응하는데 꽤 어색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디자인에 대해서 세분화해서 이야기할까 하다가, 모바일 디자인 시스템은 따로 다룰 예정이라 뭉뚱그려서 이야기해 본다.

모바일 디자인 시스템 시안

팀에서 디자인 리뷰 프로세스를 꽤 강력한 규칙으로 정해서 운영하고 있다. 피그마의 리뷰와 브랜치 기능을 활용해서 리뷰어 디자이너들의 승인이 없다면 브랜치를 머지 할 수 없도록 프로세스를 운영하고 있다. 몇 차례 시도가 있다가 이제 제대로 운영한지 반년 정도 된 것 같은데 몇 가지 배움도 있고 아쉬움도 있다만, 디자인 조직이 커지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상태가 오래 있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각자의 맥락을 알게 되어서 심리적으로 거리감이 가까워졌다.

디자인 리뷰와 피드백에 대해서 예전에 글을 하나 작성했는데, 좋은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여전히 찾고 있고, 도움이 되는 피드백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노력도 여전히 하고 있다. 예전보다 디자인 시스템 패턴도 많이 쌓이고 각 스쿼드와 도메인 기능의 안정감도 많이 올라와서 그런가 다들 매우 적극적으로 리뷰를 하고 있어서 디자인 산출물의 결과도 정말 좋아지고 있고 의미 있는 지식들도 많이 쌓이고 있다. 항상 도움을 많이 받는 입장에서 정말 감사하다.

최고의 결정을 내리는 일은 언제나 어렵고 확신이 부족하다. 순간순간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노력을 많이 하고, 동료들과 좋은 결정을 내리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 이제 일과 작업 사이에 귀여운 아내와 고양이 둘과 함께하는 생활이 들어왔다. 2024년은 무엇 하나 부족하게 시간을 쓰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마무리는 결혼한다고 이야기하니까 동료가 보내준 문구로 끝맺어본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배우자를 '기필코 사랑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결혼식에서 반지를 끼는 건 이런 의미예요 내가 너를 기필코 사랑하겠어.

너의 입 냄새에도 불구하고, 너의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너의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널 사랑하고 말겠어라는 거죠.

그러니까 결혼은 시작과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배우자를 '기필코 사랑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결혼식에서 반지를 끼는 건 이런 의미예요 내가 너를 기필코 사랑하겠어.

너의 입 냄새에도 불구하고, 너의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너의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널 사랑하고 말겠어라는 거죠.

그러니까 결혼은 시작과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